세계 교회 · 2026년 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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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십자가 현양의 역사와 유물 보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헬레나가 아들의 행동에 대한 보속을 위해 성지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주교였던 마카리는 황제에게 성지의 상황을 알리며 연구 작업을 수행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헬레나 황후는 도착 후 사제와 고고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소집하여 발굴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 유대인 가족이 보관하던 문서 덕분에 파괴 전 예루살렘의 지형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몇 주간의 작업 끝에 갈바리아 언덕과 그리스도의 무덤 동굴이 발견되었습니다. 부분적으로 매몰된 구덩이에서 세 개의 십자가가 발견되었으며, 죽어가는 여인이 세 번째 십자가에 닿았을 때 일어났다는 일화를 통해 구세주가 돌아가신 십자가가 확인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성스러운 장소에 바실리카를 건설하도록 명령했습니다. 335년 9월 14일, 십자가 성유물이 안치된 바실리카의 봉헌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현재 십자군이 건설한 성묘 성당은 헬레나가 세운 수난 교회, 십자가 교회, 성묘 교회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발견된 십자가 나무는 로마,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플 세 곳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537년에 완공한 하기아 소피아 성당으로 성유물을 옮겼습니다. 로마에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라테라노 인근에 예루살렘 성십자가 바실리카를 세워 어머니의 시신과 성유물을 안치했습니다. 이곳에는 빌라도가 예수의 머리 위에 붙였던 그리스어, 히브리어, 라틴어 기록판인 십자가 죄패도 보관되어 있으며, 12세기에 루키우스 2세 교황이 인장을 통해 그 진위 여부를 확인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유물은 614년 5월 20일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에 의해 약탈당했으나, 15년 후 비잔틴 제국의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이를 되찾았습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주교의 조언에 따라 화려한 옷을 벗고 맨발로 십자가 성유물을 바실리카로 운반했습니다. 이 사건을 기념하는 성십자가 현양 축일은 매년 9월 14일에 지켜졌으며, 십자군 시대에는 이날 예루살렘의 황금문이 개방되었습니다.
폴란드 제슈프의 성십자가 교회와 파라 성당에서도 십자가 공경이 이어졌습니다. 17세기에 제작된 십자가는 현재 파라 성당 제단 외벽에 있으며, 과거 한 소년에게 미소 지었다는 일화로 인해 웃으시는 예수님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또한 파라 성당 전실의 거대한 십자가는 300년 동안 공경의 대상이 되었으며, 1831년 콜레라 유행 당시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은총을 구했습니다. 현재 이 십자가의 예수님 발 부분은 많은 이들이 입 맞추고 만져서 마모된 상태입니다.